"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이란 이름에서는 독일의 귀족 출신의 이름 앞에 붙이는 von이 아니고 van이 붙어 있는데 이렇게 이름 앞에 van을 붙이는 것은 오늘날도 네델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이다. 실제 베토벤의 조부는 네델란드에서 독일로 옮겨와서 본 領主의 궁정악단의 악장까지도 했던 인물이며 또한 장사에도 상당히 소질이 있었다 한다. 베토벤의 음악은 그의 개성이 직접 작품속에 유출되어 있다는 -이것이 바로 중요한 낭만적 특색인데-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즉 한 개인의 꿈, 초조, 정열, 저항, 생명의 약동 등이 음악이라는 이른바 "혹정의 언어"로써 호소력있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간생활의 몇 개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것으로 생각한다. 베토벤은 1770년 라인강변의 소도시 본에서 태어났다. 궁정 테너가수인 아버지의 강요 때문이기도 해서 베토벤의 천부의 재능은 일찍이 개발되었으며 8세때에는 쳄발로 공연을 할 수 있었고 11세 때에는 네델란드에 연주여행도 하게끔 되었다. 몇몇 음악교사들 중에서 베토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교양있는 음악가 네페(Christian Gottlb Nefe 1748∼1798)이다. 그는 베토벤에게 바하의 평균을 피아노곡을 가르쳤고 그밖에 연주법, 작곡법 등을 지도했다. 17세때 빈으로 가서 모짜르트를 만난 적이 있고 일단 귀향한다. 그러나 이 정다운 음악도시에 대한 그리움을 누를 길이 없어서 22세때 다시 빈으로 가서 그것을 永住의 땅으로 삼고 만다. 그는 하이든으로부터 배우는 한편 셴크(Johann Schenk, 1753∼1836)로부터는 대위법을, 알브레 히트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으로부터는 푸가기법을, 이탈리아 작곡가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로부터는 이탈리아 가곡의 작법을 배웠으며 또한 피아노 연주가로서도 활동했다. 특히 그의 즉흥연주의 기량은 처음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베토벤은 23세 이후 줄곳 빈에 살았는데 프랑스혁명의 거센 파동을 몸소 겪어가면서 음악의 영웅다운 자각과 긍지를 가지고 예술생애를 밀고 나갔다. 만년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명성에 반비례해서 고독은 한층 더 처절한 것이다. 베토벤은 국민학교 교육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무학을 깨닫고 항상 교양을 높히는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년시절 본의 명문인 브로이닝 집안을 알게 되어 그집 미망인을 중심으로 하4?모임에서 체험한 지적 예술적 분위기는 그의 교양형성에 많은 것을 주었다. 그는 호머, 셰익스피어, 실러, 괴에테의 시라든가 칸트의 철학서적까지 그나름대로 애독했다. 이처럼 음악예술가가 자기 교양에 힘쓴 것은 적어도 그 이전에는 드문 일이라 하겠다. 예컨대 그의 글귀에는 인생과 예술에 대한 놀랄만한 깊은 지혜와 통팔이 번뜩일 경우가 많다. 청년 베토벤의 성격형성과 예술생애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28세 무렵에 시작된 청각장애이다. 귀가 먼 작곡가! 32세때 절망의 수렁이에 빠진 베토벤은 마침내 자살을 하려했으며 1802년 저 유명한 "하이리겐시타트의 유서"를 쓰게 되었다. 불구라는 컴플렉스가 인간기피와 불화를 낳게 했지만 한편 그의 음악에 외면적인 효과를 초월한 정신적인 깊이와 사상의 추구를 가져다 준 것도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하일리겐시타트의 심연에서의 울부짖음은 한편 자기 경신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소위 베토벤의 제2양식기가 시작되는 것이다.